


야경단
by 상무@pitchnbeach
1.
"세상 모두가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살진 않지. 하지만 모든 주인공들 옆에는 훌륭한 조력자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2.
도서관장 탈레스의 연락을 받은 지는 좀 되었다. 책 속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도서관이라니. 흥미로운 소개였다. 바로 들리지는 못했다. 그때 당신에겐 수련이나 모험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당신은 한동안 세계의 거대한 사건 속에 있었고, 그것이 끝난 뒤에도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원래의 일상을 체감하는 시간이. 당신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보고 느꼈던 많은 것들을 더듬으며 변한 것들과 변하지 않은 것들을 되돌아보았다. 그 작업을 돕는 것은 책이었다. 단풍잎 하나를 끼워두었던 당신만의 책. 그것은 언제나 당신의 가방 한구석에 있었다. 지나온 길과 시간을 다시금 읽고 나니 도서관에서 온 연락이 기억났다. 탈레스는 차원의 거울을 통해 그곳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당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당신은 일렁이는 표면 위로 걸어갔다. 떠오르는 대로 발을 움직이는 것은 당신의 오랜 방식이었다.
도서관은 조용했다. 사람은 당신밖에 없었다. 이따금 종달새의 지저귐과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당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높게 짜인 책장마다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었다. 도서관의 중앙에는 거대한 책인지 구조물인지 모를 것이 펼쳐져 있었다. 거기에 써진 내용은 당신이 알아볼 수 없었다. 탈레스는 당신을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이 도서관에 대해 정식으로 소개했다. 굳이 누군가가 연필을 잡고 쓰지 않아도 메이플 월드의 이야기들은 저절로 뭉쳐지며 책이 되기도 한다네. 당신은 그와 대화를 마치고 종달새가 물어온 책들을 둘러보았다. 그리 많지는 않았다. 개중에 소녀의 모습이 그려진 표지가 눈에 띄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당신은 표지를 넘기고 책의 제목을 확인했다. 여제가 되는 법? 그렇다면…. 어딘가 본 적 있는 얼굴 같더라니 시그너스 여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도 그녀가 여제가 되기 전의 일. 당신은 페이지를 몇 장 넘기다 리타에게 향했다. 여제가 되는 법을 읽으시겠어요? 리타가 물었다.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타는 책에 대한 소개와 앞으로 펼쳐질 독서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종달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멀어졌다. 당신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뺨을 간질이는 움직임 속에서 볕이 느껴졌다. 따듯하다. 당신은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3.
전신주가 가로수 같은 이 도시의 석양은 시시각각 다른 빛으로 익어갔다. 거리의 네온사인이 뜨문뜨문 켜지자 주민들은 그제야 기지개를 켰다. 당신도 따라 뻐근한 몸을 움직였다. 당신은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의 내용을 되감았다. 그러니까 나인하트가 시그너스를 찾고, 시그너스가 여제가 되도록 떠돌이 무사가 도왔다…. 여제의 이름을 딴 기사단은 무사가 에레브를 떠난 뒤에 만들어졌다. 당사자들을 제외하고 이런 역사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알 수 없었다. 이걸 내가 읽어도 되나. 탈레스의 말처럼 어떤 이야기는 직접 쓰지 않아도 한 권의 책이 된다. 세계의 지식과 기억이 뭉쳐 집필하는 이야기에 한낱 개인이 이렇다 저렇다 할 순 없을 것이다. 그건 신비롭지만 좀 억울한 일이기도 했다. 하늘에서 저작권료라도 떨어져야 하는 거 아닌가. 괜히 속물적인 상상도 하면서. 당신은 무심히 도시의 전경을 둘러봤다. 그 시선 끝에 걸린 것은 공교롭게도 기사였다. 덩치가 큰 쪽은 알고 있었다. 마티어스랬다. 그 앞에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서류를 건네는 것을 보니 그쪽도 기사인 듯 했다. 기사는 한쪽 어깨에만 걸친 망토를 벗어 팔에 걸었다. 어두운 제복은 마티어스가 입고 있는 것과 달랐다. 기사는 마티어스와 대화를 나눈 뒤 경례를 주고받았다. 기사가 몸을 돌렸다. 당신 쪽이었다. 그를 바라보던 당신과 기사의 눈이 마주쳤다. 당신을 발견한 기사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리고 당신을 향해 걸어왔다. 어? 당신은 당황했다. 설마 봐서는 안 될 모습을 보기라도 한 건지 머릿속이 분주했다. 정작 기사의 얼굴은 심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운 기색이었다. 여기서 뵙네요 모험가님. 그가 말했다. 당신은 멋쩍게 인사를 받았다. 아, 예…. 기사가 미소를 지었다. 제가 누군지 모르시는군요. 미안해요. 기억이 안 나네요. 당연하죠. 우리가 말을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요. 기사가 말했다. 그런데 절 어떻게 아세요? 당신이 물었다. 저도 크리스탈 가든에 있었습니다. 기사가 대답했다. 당신은 아, 짧게 대꾸했다. 혼자 움직이셔서 함께 싸우진 못했지만 활약하시는 모습을 꽤 가까이에서 봤습니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더군요. 치켜세우는 말에 당신은 어색하게 웃었다. 다들 고생 많았죠. 기사는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다 주제를 돌렸다. 커닝시티에는 어쩐 일이세요? 들릴 곳이 있어서요. 들릴 곳이라면? 도서관이요. 기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커닝시티에 도서관은 없는데요. 기사에게 차원의 도서관에 대해 아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차원의 도서관이 뭐죠? 그가 물었다. 그럼 얘기가 좀 길어지는데. 당신이 말끝을 흐렸다. 기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당신에게 제안했다. 제가 눈치 없이 모험가님을 잡는 게 아니라면 앉을 곳이라도 찾을까요. 당신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지 몰랐다. 왜 그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생각이라도 읽은 듯 기사가 말을 덧붙였다. 당신은 뒤쪽에 있는 마티어스를 쳐다보았다. 일하러 온 거 아니에요? 기사는 한쪽 팔에 벗어둔 망토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방금 퇴근했어요.
철골구조만 올려둔 채 버려진 건물은 방치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신은 앞서 걷는 기사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버려진 공사장이라지만 계단을 밟는 뒷모습이 거리낌 없었다. 자주 와봤어요? 당신이 물었다. 이곳 말입니까? 네. 저 여기 출신입니다. 기사가 대답했다. 어쩐지. 당신은 신발을 내려봤다. 나무판자로 덧대어 만든 계단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대며 울었다. 당신과 기사는 그 소리를 무시하며 옥상에 도착했다. 바람은 이미 도시의 저녁을 한번 통과해 당신의 얼굴에 닿았고 그 꼬리에 녹내가 섞여 있었다. 크레인 줄을 따라 내려가던 태양이 건물 뒤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하늘에선 짙푸른 붓기가 내려오고 당신은 듬성듬성 반짝이는 것들을 발견했다. 한낮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빛은 신호를 닮았다. 거기에 응답하듯 도시의 가로등이 켜지고 창가가 밝아왔다. 기사는 당신에게 손짓했다. 규격에 맞춰 잘린 쇠파이프들은 용도를 잃은 채 쌓여있었다. 기사는 흙먼지를 털고 그 위에 앉았다. 당신도 자리를 잡았다. 앉을 곳이라고 해서 재즈바 같은 걸 생각했는데. 당신이 중얼거렸다. 거기로 갈 걸 그랬나요. 기사가 웃었다. 당신은 그냥 해본 소리라고 했다. 노을이 멋지네요. 당신은 다시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기사도 같은 곳을 응시했다. 서쪽이니까요. 그가 대답했다. 그래서 차원의 도서관이라고요. 기사는 허벅지 위에 망토를 내려놓았다. 당신은 턱을 괴고 도서관을 떠올렸다. 당신은 탈레스에게 들었던 소개를 생각하며 도서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말하는 동안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작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책 좀 읽으셨나요. 기사가 물었다. 당신은 생각에 빠졌다. 딱히 비밀로 해야 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가볍게 떠들고 다닐 얘기도 아닌 듯했다. 게다가 상대는 기사였다. 시그너스 기사단이 생기기 바로 직전의 이야기였어요. 고민하던 당신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궁금하네요. 기사가 말했다. 수련기사가 되기 전에 에레브의 역사를 짧게 배우긴 합니다. 필수는 아니고 교양 정도로요. 그는 언젠가 도서관에 가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당신은 기사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검푸른 눈동자는 어둠이 내려앉는 하늘과 닮은 색이었다. 기사단에 들어간 지는 얼마나 됐어요? 당신이 물었다.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기사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겼다. 입단하기 전까진 쭉 여기서 지냈죠. 뭐하면서 지냈는데요? 당신이 물었다. 나쁜 짓은 안 했습니다. 기사가 대답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도시를 가리켰다. 별거 없었어요. 해가 중천일 때 일어나서 주민들에게 부탁받은 일을 했죠. 심부름 같은 잡일 말입니다. 밤이면 사람들과 조를 짜서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니며 무슨 일 없나 확인하고. 그게 주로 하는 일이었어요. 밤에 돌아다니는 거요. 그가 말했다. 야경단 같은 거네요. 맞습니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두고 기사단에 들어간 이유라도 있어요? 당신이 물었다. 제가 그만둔 게 아닙니다. 기사는 정면을 바라봤다. 야경단이 없어진 거죠. 함께 했던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거나 흩어진 채 남았다. 많은 것이 변했고, 그 또한 변해야 했다. 그는 도시에 남았지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이제껏 도시의 밤을 돌아다니며 지켜보는 일밖에 하지 않았다. 독립은 막막했다. 그 시기에 시그너스 기사단이 기사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동네 야경단에서 기사라니 출세했죠. 그가 웃었다. 게다가 여제님이 지키실 세계에는 이 도시도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요. 기사는 덧붙였다. 그것이 도시의 밤을 지키던 미련인지 애정인지 당신은 묻지 않았다. 기사는 다시 주제를 돌렸다. 모험가님이라면 어떻게 하실래요? 뭐가요? 모험가님의 인생이 책으로 만들어지면 말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실래요? 그 도서관의 책들은 자서전 같은 게 아니었다. 세계의 지식과 기억, 그 위대한 관찰자들이 모여 만드는 책에 당신이 바라는 첫 문장이 올 확률은 적을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이야기일지라도. 당신은 언젠가 그 책장에 당신의 이야기가 꽂히는 상상을 했다. 당신은 가방 위로 손을 얹었다. 커다란 단풍나무요. 당신이 대답했다. 기사는 당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멋지네요.
3.
박명은 그 밝기에 따라 붙는 이름이 달랐다. 당신은 보랏빛 띠지 같은 지평선을 보며 그 명명들을 더듬었다. 밤이 오고 있었다. 당신은 그 모습을 뒤로하고 기사와 함께 공사장을 내려왔다. 묵고 가십니까? 아뇨. 더 늦기 전에 출발해야죠. 그쪽은요?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조금 더 있다가 갈 생각입니다. 기사가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당신은 아직 정하진 않았다고 했다. 천생 모험가시군요. 기사들은 이런 거 못 하죠? 그건… 좀 재수 없네요. 그 말에 당신이 키득거렸다. 기사도 비슷한 웃음을 지었다. 이야기 나누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영광까지야. 영광이죠. 세계의 영웅이신데. 당신은 다시 머쓱한 기분을 느끼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자 기사는 눈을 감은 채 그 위로 다른 손을 겹쳤다. 곧 기사의 등 뒤로 거대한 문양이 피어올랐다. 접혀있는 날개. 당신은 그것을 본 적이 있었다. 갑판 위에서였다. 기사들은 전투에 들어가기 전 한데 모여 자신들의 맹세를 되새겼다. 펼쳐진 날개의 색은 다양했다. 그것이 그들의 소속을 나타냈다. 당신은 눈 앞에 펼쳐진 날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보랏빛이었다. 박명의 색으로 펼쳐지는 날개. 그 뒤로 같은 빛을 품은 채 밤을 맞이하는 도시가 있었다. 기사가 눈을 떴다. 검푸른 눈동자가 당신을 응시했다. 이건 기사들끼리 나누는 거잖아요. 당신이 말했다. 글쎄요. 보통 그렇지만 전 기사들끼리만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기사가 손을 거두었다. 여제님을 지킨다는 것은 그분의 뜻도 함께 지키는 일이라서요. 평화 말입니다. 기사는 당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책이요. 기사단이 만들어진 이유도 적혀있었나요? 당신은 신비했던 독서를 떠올렸다. 무사는 에레브를 떠났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어린 여제는 말한다. …저에겐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해요. 저를 언제나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남은 인생을 끝까지 저와 함께할 사람들이요. 당신은 그 말을 기억했다. 적혀있었어요. 당신이 대답했다. 그럼 세계의 수호자에게도 수호자들이 필요하시다는 걸 아실 겁니다. 그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기사는 다시 어깨에 망토를 둘렀다. 꼭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네요. 당신이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걱정하기엔 모험가님은 너무 강한 분이시잖아요. 그럼 뭔데요? 오지랖 아닐까요. 당신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나쁘진 않네요. 그럼 다행입니다. 그것도 제 일일 때가 있거든요. 기사는 품 안에서 가면을 꺼냈다. 가려진 얼굴 안에서 안부 인사가 빠져나왔다. 그럼 언젠가 또 뵙겠습니다. 당신은 발을 돌리는 모습에 말을 던졌다. 퇴근했다면서요? 기사는 당신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밤이잖아요. 또 돌아다녀야죠. 예의를 차린 경례와 함께 그는 떠났다. 당신은 어느덧 내려온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정거장에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은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풍경과 위상, 사고와 시련, 때로는 당신을 부르는 호칭마저 달라지더라도 끝내 당신을 유지할 마음에 대하여. 기사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당신도 묻지 않았다. 당신은 그를 다시 만나는 장면을 그렸다. 배경은 박명처럼 계속 바뀌었다. 그곳은 도시의 버려진 공사장이었다가 지도에도 없는 길 위가 되었고 도서관으로 변했다. 그러나 모두 평화로운 곳이었다. 당신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