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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님

by 힐@H__L_IM

   꿈에서 깨어난 몽롱한 기분이다.

   방금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기억을 당장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내 손은 이미 낡은 노트의 여백을 신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유리병에 담긴 마나 물약을 남은 한 방울까지 털어내며 들이켰다. 기도는 얇은 소매를 따라 푸른 아우라를 일으킨다. 치유의 대상을 가리키는 손 끝부터 서서히 사라지는 혈색. 차가운 기운이 팔을 타고 올라가자, 선명했던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하얀 손목에 감긴 푸르딩딩한 핏줄이 튀어나오며 바짝 힘이 들어간다. 보는 눈보다 듣는 귀가 예민해진다. 바람에 흐드러진 잎사귀 소리 사이로 색색거리며 호흡을 되찾는 여린 생명의 숨이 들린다.

   나는 단시간에 많은 마나가 소모되는 마법을 사용할수록 시각을 동시에 유지할 수 없다. 선천적인 문제다. 이런 체질로 타인을 살린다 한들 자신의 사정을 누가 일일이 알아주겠냐마는, 그런 내가 어렸을 때부터 사제의 길을 가려고 하는 병적인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기도를 끝내자 아이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빳빳하고 결이 고른 꼬리가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그 작은 몸짓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빛이 돌아온 눈을 마주한 소동물은 자신이 딛고 서 있는 내 두 손바닥 안에서 우물쭈물 허둥거리다 바닥에 내려온다. 고마움을 알아달라는 건지 한동안 멀리 도망가지 않고 주변을 여섯번이나 맴돌았다.

   처음 사용해본 강화형 치유술로 생명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 현실을 보자 어깨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마나량의 차이가 날뿐이지 전체적인 틀은 간단한 술식이야. 쓰고 남은 정신력으론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무 스태프로 마을의 가장 낮은 곳의 구석구석 같은 마법진을 그려냈지만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신체의 상처를 치료하는 마법과 그 그릇에 담긴 혼과 정신을 살리는 마법은 분명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술식은 외상만을 치료할 뿐. 대상자가 어느 정도 숨이 붙어있을 때만 재생력이 구현되는 마법이었다. 소모되는 마나량과 나에게 생기는 부작용들에 비해 실질적인 성능은 턱 없이 부족했다.

   불구덩이에 던져넣으며 살아왔던 내게 '자네가 살아야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다.' 라고 조언해주셨던 스승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감당하기 힘든 신성마법을 실전에서 남발하다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채 청각과 촉각에 의해서만 살게 될 것이다. 한계치를 넘겼을 땐, 다른 감각까지 잃어버리지 않을까. 지금으로서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문득 나는 원초적으로 무엇때문에 이 고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죽은 듯 사는 것이 두려운가.

   살리지 못한 죄책감이 두려운가.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

 

   가벼운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마을에서 조금 동떨어진 마법사협회에 도착했다. 고대 마법엔 이 정도까지의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쓸 수 있는 치유술이 있었다고 한다.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문을 열자 텁텁한 책의 향이 코를 자극했다. 사다리를 짚고 옆으로 늘어진 치맛단을 밟지 않도록 조심조심 올라갔다. 사방이 마법서적으로 둘러싸인 가운데에 서서 책장을 하나하나 훑어본다. 같은 자리에서 마법의 역사, 마나의 순환, 생명의 진실. 등 몇 권의 책을 정독했으나 원하는 정보에 관해서 별다른 소득을 못 찾았다.

   가장 높은 선단에서 [마법사의 이야기]라는 제목이 적힌 책이 있었다. 낯설었다. 설화와 우화가 꽂혀있는 책장에 있어야 할 책이 이론과 법학이 몰린 책장에 있다는 것에 쓸데없는 정리벽을 느꼈다. 나무 발판을 딛고 올라가야만 닿을 높이였기에 검지손가락으로 책의 모서리를 건드린 뒤 아래에 달린 책갈피 끈을 당겨 조심스레 잡아 내렸다.

   오묘한 빛깔의 가죽 표지는 누군가의 원망이라도 섞인 듯 잔뜩 훼손되어 있었다. 책을 고정해두던 질긴 끈의 단추를 똑딱이며 열어내는 순간에도 쾨쾨한 먼짓가루들이 주홍빛 조명 아래에서 눈발처럼 흩날렸다. 천재였지만 위험한 마법을 다루던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엘리니아의 장로 휴노는

그의 마법을 영원히 봉쇄하고

장로들의 감시 아래에 두기로 했답니다.

천재 마법사의 끝이란, 너무도 처참했지요.》

   많은 생명을 희생시키며 마법을 연구하던 그의 행방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엘리니아의 전 장로인 휴노와 동시대에 살았던 스승님을 떠올렸다.

 

*

 

   과거엔 모든 상급 사제가 비숍이란 이름을 가질 수 없었다고 한다. 모험가 출신의 사제가 시련 끝에 찾아낸 최상단 신성 마법. 리저렉션이 발견된 당시 그 마법을 통달한다는 것은 말단 사제들에게 내려진 가장 큰 벽이자, 두려움의 영역이었다.

   상상 속에서만 구현 되던 부활 마법이 발견된 직후. 메이플 월드를 상주하는 마법사들이 당신의 제자가 되겠다며 그 모험가를 찾아갔다. 곤란한 표정을 짓던 그는 카론의 노트라는 책을 남긴 채 자취를 감춘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고대 마법의 유혹이 많은 마법사들의 호기심을 건드렸고 카론의 노트를 펼치게 했다. 책에 적힌 이름을 아는 자들만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숲을 떠났지만, 돌아오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일부 마법사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기대로 가득 찬 주민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초췌한 안색으로 자신만의 연구실에 들어가 바깥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몇 달이 지나자, 지저분한 방 안에서 죽은 채 발견된 마법사들은 모두 섬뜩할 정도로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협회에선 이 현상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기에 부활 마법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카론의 노트를 금서로 지정시켰다.

   "신성마법의 목적은 생명을 살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젊은 사제가 말을 하자, 휴노는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 희생된 마법사들의 가족들을 보아라. 이 모습이 축복인가."

   마법사들은 침묵했다.

   "죽은 이들을 살린다는 능력이 오히려 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이젠 우리를 지켜야 한다.

훗날, 이 마법을 감당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어느 모험가에게 다시 발견되어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달랠 수 있으리라."

   그의 말에 많은 마법사들이 동요하였지만 크게 반발하는 자는 없었다. 마법사의 마을이 제 모습을 갖춘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남겨진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여론은 하나로 모였다.

   화로 앞에서 금서의 내용이 필사된 종이 뭉치들을 모조리 불태운다. 너무 이른 시대에 발견된 고대 마법의 단서들이 잿더미로 변해갔다.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샤모스만이 굵은 손가락으로 뒷머리를 쉴 새 없이 북적이며 참을 수 없단 표정을 짓는다.

   '멍청하고 겁 많은 사람들 뿐이군.

    저 마법이야 말로 나의 실험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는 걸작인데 말이지.'

 

   마법 연구에 눈이 먼 그는 협회에 몰래 잠입하여 원본을 빼돌린 뒤, 여타 시련을 겪은 소수의 마법사들처럼 본래의 거처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샤모스 또한 서서히 마을 사람들과 동 떨어진 채 어둠에 잠식되고 말았다.

   엘리니아의 장로 휴노는 금지된 마법에 손을 댄 그를 엘나스에 영원히 감금하라 명했다.

 

*

 

   하인즈는 검은 금서를 자랑스레 보여주던 친구를 떠올렸다.

   하인즈는 친구의 과거가 담긴 책을 들고 왔었던 제자들을 기억했다.

   그리고 지금. 그때와 같은 책을 들고 자신을 찾아온 또 다른 제자를 보았다.

   그는 주름진 손바닥으로 이야기 책의 표지를 다독이듯 매만진다. 한참을 고민하는 눈치다.

   하인즈는 그녀의 눈을 마주하며 샤모스를 찾아가라 하였다.

 

*

 

   햇빛조차 통하지 않는 암실 속에 들리는 불쾌한 중얼거림. 슷, 슷 거리는 들숨 사이로 쿨쩍거리는 호흡이 공간을 울린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텐데도 쉼 없이 입맛을 다시는 녹색 미치광이가 여전히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으흐흐... 흐흐흐..."

   그는 속박구로 감긴 주변이 간지러운지 제 발목을 기고 있던 생명체의 가슴을 뾰족하고 거친 손톱으로 틱,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가른다. 가엾고 더러운 벌레는 묵은 각질과 함께 축축한 바닥 위로 떨어졌다. 콧볼 옆에 툭 튀어나온 종기를 습관적으로 건드리던 호브는 문 앞에 손님이 와있는지도 모른 채 중얼거린다.

   "...아냐 헥터의 꼬리는 틀렸어... 플라이아이의 눈알을 으깨서 섞으면... 이런 씨발. 이걸 해봤자 되겠냐고. 난 못해. 아무것도 못 한다고. 다 들켰어. 지들이 알고 싶은 거만 뱉어내라는 인간놈들이... 날..."

   욕지거리를 섞으며 혼잣말을 하던 그의 근처로 다가가자 상반된 마력의 흐름을 느꼈다. 귓가에 쨍한 이명이 들린다. 뒷골이 아프다.

 

-

 

   샤모스는 깊게 팬 눈두덩이의 눈꺼풀 가죽을 번뜩 들어 올리며 자신을 찾아온 당돌한 손님을 찬찬히 관찰했다. 그림자라도 되는 마냥 칙칙하고 반투명한 로브를 입은 마법사는 한손에는 붉은 보석이 박힌 책을 들고, 다른 손으론 깊게 눌러쓰고 있던 검은 모자를 등 뒤로 내린다. 이마를 덮는 곱슬기가 있는 회색 머리. 눈 아래 그림자 진 모습. 왜소한 체구에도 얼굴의 절반을 뒤덮는 둥근 안경테 뒤편으로 보이는 분명한 눈빛. 그 아래 조막만 한 입을 열기 전까지 샤모스는 이 인간이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엘리니아에서 왔습니다. "

   "너도 그 빌어먹을 놈의 제자새끼냐."

   힐은 대답 대신 스승님께 돌려받은 책을 그에게 건넨다. 샤모스는 그것을 던져버렸다. 질린 표정이다. 그의 과거는 벽에 부딪힌 채 바닥에 둔탁한 소음을 일으키며 방 안을 울렸다.

   "알아? 하인즈 녀석 말이야..."

   그의 쇳소리가 섞인 음성은 고막을 부딪혀 비틀고, 귓바퀴를 가른다.

   "이렇게 너 같은 조무래기들을 나한테 오게 만들어서 금지된 마법을 배우게 만들잖아?

    자신은 비겁하게 지켜보기만 하면서...

    너희들이 어떻게 어둠에 잠식되는지 지켜보고 있단 걸 말이야."

 

-

 

   샤모스의 비뚤어진 시선과 악에 받친 폭언은 역대 현자들을 향했다. 역정을 내다가도 비웃기도, 나에게 하소연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말도 이젠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푹 떨궈버린다.

   "불멸자들이 가진 지식이 탐났어. 그들이 만든 고대 마법에 대한 연구는 내가 사는 곳을 영원히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줄 알았지."

   영원. 다른 도서관에서 수천번을 듣던 익숙하면서 불쾌한 단어에 눈살을 찌푸렸다. 호브의 작은 키와 굽은 등이 두드러져 보였다. 척추뼈가 하나하나 보일 정도로 말라비틀어진 몸이 더욱 지쳐 보였다. 동정심이 생길 것 같았다. 샤모스는 내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목소리의 톤을 한껏 낮추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멍청한 네 녀석에겐 꼭 맞는 위대한 마법이 있다고.

   "리치가 봉인된 곳을 찾아가. 녀석의 멍청한 하수인이 내가 연구하던 걸 훔쳐 갔어.

    혹시 너도 흥미가 생기면 찾아보라고."

   샤모스는 입꼬리가 찢어질 듯 들어 올린다. 킬킬거리는 소리가 곰팡이 낀 나무 벽에 사정없이 부딪힌다.

   "과연 이번엔 실패할지, 역사서에 그 장로 할배들처럼 이름이나 남겨둘지. 큭큭큭...

    누굴 살려봤자 자기도 이미 죽어버린 몸인데 웃기는 놈들이야 아주."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 한참을 폭소하던 그는 숨을 크게 고르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볼 일 다 봤으면 꺼져. 그리고 로베리아님에게 전해.

    이젠 제정신이니까 여기서 꺼내달라고. 제발."

   로베이라에게 샤모스의 말을 전했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네요. 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관저에서 나온 뒤 설산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때도, 최근에도. 엘나스에는 주기적으로 쿨리 좀비의 습격이 있어 안전하지 않다는 말을 폭스 상사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호브의 말을 믿기로 했다.

 

*

 

   짙은 구름이 다가온 하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근처 중앙 도서관에 도착한 뒤, 옷에 묻은 물기를 툭툭 털었다. 스승님의 자리를 확인했다. 오늘은 자리를 비우셨구나.

   책을 읽을 때 늘 머물던 2층 구석의 다락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품속에서 꺼낸 검은색 표지의 책. 얼룩덜룩한 종잇장에 빼곡히 나열된 단어들을 읽어 내려갔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거세지기 시작한다.

 

*

 

   사상의 경계를 넘어 출몰한 공포들은 아군들에게 쉴새 없이 치명상을 입혔다. 정신력을 유지하기에 꽤 괴로운 상황이다. 하늘은 눈치가 없는 건지 빌어먹은 초월자는 이런 날씨를 좋아하기라도 하는지 쏟아지는 폭우에 어깨를 감싼 망토가 잔뜩 젖어 무게를 더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괴수 공격으로 창을 쥔 아군이 함선 바깥으로 날아간다. 괴물의 딱딱한 촉수 끝에 상체가 관통되어 움찔거리며 바닥을 기고 있는 병사들이 좁아터진 길목에 무더기로 쌓여, 후방에서 들어오는 지원병들에게 밟힌다. 팔과 다리가 뜯긴 부상병들은 부서진 함포 뒤편에 기댄 채 헐떡이던 움직임이 둔해진다.

   바삐 회복주문을 외던 사제들의 방향으로 병사들의 수많은 시선들이 오갔다.

   죽어 나가는 수에 비해 그들을 살릴 사람은 턱 없이 부족했다.

   얼굴 구멍마다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든다. 마법사들은 마나 중독을 버티지 못하면 마력이 대신하던 고통이 신체에 그대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내상이 일어나 터져 나오는 핏물은 소매로 급히 닦아낼 때마다 살갗에 번지는 붉은 얼룩이 얼마 머물지도 못한 채 빗물에 씻겨 내려간다. 내가 아파할 시간따윈 없다는 건지.

   비축해둔 마나 물약이 다 떨어져 갈 때 쯤 최전방에 지원이 필요하다는 외침을 들었다.

   어떤 기도도 닿지 않아 명을 다한 남자가 뉘어져 있었다. 누구보다 최전방에서 아군과 세상을 지키기 위해 맞선 모험가가. 그를 살리기 위해 재생마법을 쓰기엔 내게 남겨진 마력은 턱 없이 부족했다. 김이 서린 듯 희뿌연 시야 너머로 이미 비어버린 물약병들은 바닥에 깨진 채 나뒹굴고 있다. 죽은 그의 품에 생전 직전의 기억을 되살리는 부적의 빛조차 사라졌다는걸 깨달았다.

   그때 멀리서 다급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제님! 위험합니다! 여기 있다간 괴수가...!"

   나를 향했던 말의 끝을 맺지 못한 병사는 결국 목이 날아가버린다. 입술을 구겨물었다.

   내가 살아야 모두를 살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다시는 품에서 꺼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검은 책을 펼쳤다.

   두 손가락으로 세 번째 문단을 짚어 흔들리던 시선을 고정했다.

   자애의 여신이시여.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은 내게 첫 구절만을 허락했다. 온몸이 거부하는 마지막 경고라 생각했다. 어둠 속을 헤맸던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에 뒤섞인다. 카론은 다시는 이곳에 찾아오지 말라 하였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면 더는 사람을 살리지 못한 죄책감을 가지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와 동등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칙에 나를 예외로 둘 순 없다. 주문을 읊었다.

   제안의믿음이닿는다면고귀한성령의힘을빌어죽음의강을건너려는가엾은신자들의몸과마음, 영혼을구원해주시옵소서. 저의존재를쓰러진이들의고통을대신하게해주시옵고.어둠속에서길을잃고헤매는망자들의길잡이가되어주시옵고,저의기도가끝난뒤엔삶의경계에돌아온자들에게평안을가져다주시옵소서.제가본것그리고제가들은것과느낀것그곳에서떠돌고있는영혼을반드시찾게해주시옵소서.

   영창을 끝나자 온 몸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가슴께에 움켜쥐고 올렸었던 손안엔 맑고 따스한 빛 덩어리가 실뭉치가 되감아지듯 둥근 구체가 형성되고 있었다. 맥박 소리와 같은 리듬으로 움찔거리는 잔상을 보자,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멈춰버리기엔 이미 늦어버렸다는걸 알고 있다. 금서는 펼쳐졌고, 스태프를 치켜들어진다. 영혼의 형체가 하늘에 쏘아 올려지더니, 사방으로 눈부신 빛을 울컥울컥 쏟아내기 시작했다. 빛의 범람이 눈 앞을 가린 잿빛 머리카락을 삼킬 듯 덮는다. 공중에 소환된 거대한 마법진 위로 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심장 고동 소리가 점차 느려지는걸 느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리자 하늘을 향해 뻗었던 손이 저 멀리 아득해진다. 눈앞엔 눈송이처럼 새하얀 깃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상체가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

 

   그 곳은 무의 공간이었던 시련과는 다른 형태로 변이 되어있었다.

갑판에 시체가 즐비했다. 진득히 달라붙는. 물컹한. 찢어지고 늘어난 살점들이 짓밟히는 소리.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이 뭉개진 얼굴. 저세상에서도 들었던 괴로운 신음. 눈을 감아도 수많은 병사들이 난도질 당하는 실루엣...

   '내가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마음이 읽힌 걸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과 동일한 빛을 내는 영혼이 보이면 반드시 찾아야 했다. 빛을 좇아 쉼 없이 달려가던 발밑으로 땅이 꺼진다. 꽤 높은 곳에서 추락한다. 공중에서 느껴지는 아찔했던 기분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갈비뼈가 부서지는 고통에 산산조각이 났다. 팔을 뻗어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킬 때까지 꽤 많은 힘이 필요했다. 맨발로 바닥을 밟을 때마다 거친 날붙이들이 살을 파고들었다. 철퍽- 하고 엎어진 나는 온 몸에 흠집을 낸 채 또다시 일어났다. 느릿하지만 멈추지 않고 앞으로 간다. 익숙한 호브족의 그림자가 지나가며 너도 이제 죽어버린 몸인데. 라는 헛소리를 들었다.

   '아직도 정신이 나가 있군.'

   호브를 믿지 않았다. 뜬 눈으로 일렁이는 사람 형체의 빛을 향해 나아갔다.

   갑판 끝에는 물이 가득 차 있어, 거대한 나무배와 뱃사공 카론 앞에는 많은 영혼이 줄을 서 있었다.

   구원해야 영혼의 빛이 한곳에 몰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텅 빈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본다. 영혼들의 손에 들린 금화를 뺏었다.

 

-

 

   영혼에게 뱃삯을 받던 카론이 움직임을 멈췄다. 갑판 너머로 멀어지는 영혼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구긴다.

   카론이 들고 있던 노는 날카로운 낫이 된다.

   뱃사공은 길게 뻗은 검은 날을 환한 빛을 뿜으며 도망치는 힐을 향해 가차 없이 내리쳤다. 거리의 차이가 그녀를 두동강을 낼만큼 가깝지 않았지만 그 힘은 작은 영혼의 등을 가르며 검은 핏물을 터트린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사제를 함께 도망치던 영혼들이 받아냈다.

   사공이 더는 그들을 쫓아오지 않았지만, 그의 잔뜩 화가 난 목소리가 귓가를 쩌렁쩌렁 울렸다.

   죽음의 신께서 노하셨다.

   다시는 너의 목숨을 건져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의 생명엔 하나의 대가를 치러야 하리니.

   그 수를 넘은 자에겐 다음 생이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

 

   계단을 올라 거대한 문을 열었다.

   우리는 여신의 깃털로 온 몸을 뒤덮으며 깨어나는 영혼들.

   부활하는 사람들의 붉은 피딱지와 곪은 상처들이 부서지듯 사라졌지만, 검은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다.

 

 

 

*

 

   그녀가 한동안 의식을 잃고 긴 잠을 자는 동안

   연합이 승리했다는 함성이 하늘에 울려 퍼진다.

 

 

 

*

 

 

 

   "누가 이 시간에 들어오라 했느냐. "

   꽤 시간이 흘렀는지 스승님은 마법구의 푸른 빛무리가 긴 그림자와 함께 다가왔다. 넋이 나간 채 지난 날들을 회상하던 힐은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책을 소매 속에 숨겼다. 하인즈는 모자로 반쯤 가려진 얼굴을 잠깐 치켜들더니 작게 날숨을 뱉는다.

   "괴롭느냐."

   "..."

   "자네가 원한다면 릴리를 부르도록 할 테니."

   "그럴 필욘 없어요."

   하인즈는 가엾은 제자를 보며 두 번째 손가락으로 고목의 줄기로 엮어진 스태프를 두드린다. 콧김에 곱게 빗긴 하안 수염이 흩날렸다. 그 모습에 힐은 괜히 웃음이 났다.

   "잊게 되더라도 저는 다시 궁금해질 거예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스승은 눈을 감고 대답했다.

   힐은 책을 덮으며 말했다.

   "이젠 뭘 해야 할지도 알겠어요."

   항상 입가에 미소만을 남기던 그녀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

 

   높은 나무들이 노을빛을 등지고 서 있는 익숙한 마을의 초입. 느지막한 오후 다섯 시쯤이었을까. 부드럽게 일어난 나뭇잎들을 맨 발로 스쳐 지나가며 기분 좋은 간지러움을 느낀다. 경사길을 따라 위로 올라갈 때마다 가까워지는 은은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찡그린 눈꺼풀사이로 물기를 머금은 회색 눈동자가 옅게 반짝였다.

   휴식을 취하기에 가장 적당한 공간에서 팔을 베고 누웠다. 숨을 크게 들이마실 땐 온몸 구석구석 깨끗한 공기가 들어차는 기분. 발끝을 스치는 이 작은 새싹에도, 나무를 타고 오르는 작은 동물들에게도, 생명의 바람이 초록 줄기를 타고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눈을 감고 가장 소음이 적은 풀숲에 누워선 제 심장이 아직 뛰고 있다는 걸 느끼곤 한다.

 

-

 

   한동안 엘리니아를 떠나기로 했다.

   빽빽한 침엽수로 가득 찬 설산 속 폐광으로 내려가는 심층부에 다시 돌아왔다.

   "다음 생이 없을지라도 후회하지 않아."

   검은 책을 절벽 끝에 서서 던져버렸다.

   저주받은 땅으로 추락하는 카론의 노트는 찢어질 듯 차가운 바람에 날리며 책의 주인이 남긴 글자 외에 기록된 모든 문장들이 사라져갔다.

   죽음의 순리를 거스르며 저승 신의 노여움을 사는 금지된 마법은 또다시 죽은 자들의 공간에 떨어져 자연히 봉인된다.

 

-

 

   신은 말했었다.

   영혼을 살리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견디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영혼의 영원을 희생할 수 있는 자 만이,

   가장 많은 이들을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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