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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날레

by 사설@saseol_

   저도 그녀를 만난 적 있어요.

   어떤 연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길을 잃었던 적이 있습니다. 숲은 햇빛이 잘 들지 않아서 어둑어둑했고 발길을 옮길 때마다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죠. 저는 처음 보는 몬스터들이 무서워서 한참을 울고 있었고, 그때 어디선가 그녀가 나타난 거예요. 시야 안으로 가볍게 휘날리는 핑크빛 머리카락이 들어왔을 때 저는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분명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그녀는 맑게 웃으며 저를 토닥거렸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요. 그래도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긴 하더군요. 나빠 보이는 사람도 아니었고요. 그렇다 해도 여전히 눈앞에는 수많은 몬스터가 있었기에,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자연스레 그런 걱정이 들었습니다. 저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는 제 속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천천히 앞으로 향했어요.

   그제야 그녀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잠시 뒤 요란한 폭풍이 밀려왔거든요. 새까맣고 캄캄한 먹구름은 번개를 잔뜩 머금고 있었죠. 저는 놀라서 주춤 물러섰지만 이내 호기심이 일어 좀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폭풍은 그녀를 따라서 이리저리 이동하다가 때맞춰 번개를 내리꽂았어요. 수풀 뒤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본 게 다라서 그렇게 생생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광경을 한참을 보고 있자니 폭풍우 치는 바다가 떠올랐습니다. 난파된 배가 마주쳤을 폭풍이 저런 걸까 싶더군요. 한참이 지났지만 번개는 멈출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폭풍과 함께 몬스터들의 사이사이를 경쾌하게 뛰어다니며 점점 더 안쪽으로 향했어요. 얼마 후 적당한 자리를 잡았다 싶었는지 그녀는 잠시 제자리에 멈췄고, 저도 눈으로 그 자취를 쫓다가 그곳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몇 초가 지났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숨을 죽이고 있자니, 어느새 시야가 쨍한 파랑으로 뒤덮이더군요. 눈을 잠깐 깜빡이자 몬스터들이 전부 사라져 있었어요. 펼쳐진 풍경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을 정도로 멋졌습니다. 주위는 온통 뾰족하게 돋아난 얼음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저는 그 모습을 보며 무심코 엘나스를 떠올렸습니다. 그곳의 눈처럼 차갑고 깨끗해 보이던 얼음… 아주 오래전의 세상은 그런 풍경이었을까요. 차마 만져볼 용기는 나지 않았기에 그냥 눈으로 보는 게 다였지만요. 어디로 시선을 옮기든 날카롭고 빼곡하게 채워져 있던 그 풍경을 말이에요.

   그녀는 다시 제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다 파랑을 좋아하냐고, 문득 그렇게 물었습니다. 선명한 눈동자도, 입고 있던 옷도, 땅 위로 소복하게 쌓이던 얼음도 전부 푸른색이었으니까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세계를 엿본 느낌이었습니다. 그녀는 웃으며 그렇다고 선선히 답했고, 저는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던 아쿠아마린을 건넸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파랑은 그것뿐이었거든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맙다고 말했어요. 그리곤 자신이 쓰고 있던 우산을 접어 제게 쥐여 주었고, 바빠서 저를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한다는 것에 미안해했습니다. 하지만 길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곤, 시야 너머로 총총히 사라졌어요. 저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곧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어요. 텔레포트를 한 자리마다 땅이 얼어붙어 있었거든요. 저는 조심스레 그 자취 옆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녀가 닿았던 지면 위로 피어난 것들, 그러니까 잔향처럼 남아있던 얼음. 그 덕분에 무사히 길을 찾을 수 있었어요.

   글쎄요. 이후로 다시 만난 적이 없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따금 무수한 파랑으로 둘러싸인 그녀를 생각하곤 합니다. 넘실거리는 파도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돌고래 한 마리처럼 지금도 어디선가 멋진 마법을 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번개와 얼음을 흩뿌리며 언제까지나 그녀만의 흥미진진한 모험을 계속할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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