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말복님.png
말복님.png

생셧

by 말복@thelastluk

   저것은 사람의 숨결을 갉아먹고 발목부터 뒷목에 이르기까지 수 초도 걸리지 않는 가장 전율하고 죄스러운 망설임을 부추겼다. 그러나 난 저것으로부터 벗어나고서도 벗어난 것에 기뻐할 틈도 없이 저것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내달려야 했다. 발끝과 덜미를 뒤쫓는 질척하고 스산한 기운과 주변을 붙잡고 쥐어 터트리듯 비틀린 공기, 그곳에서 겨우 호흡하는 나의 옅은 숨과 다급하게 벌름거리는 콧방울 따위를 의식하며 이카르트로부터 뿜어져 나온 거대한 어둠의 늪으로부터 도망쳤다. 발이 닿는 곳마다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어둠을 잔뜩 부어놓은 늪을 만들고 늪 그 자체로 차지하는 공간뿐만 아니라 주변의 먹잇감을 낚아채듯 범람하는 어둠의 기운이―다크니스 오멘이―힘껏 내달려 도망친 발걸음이 지나온 자리마다 으스스하고 위협스럽게 넘치고 있었다. 난 이미 저것에 흠뻑 빠져 온몸이 넝마가 되도록 붙잡히고 짓눌려 유린당했던 언젠가를 가졌다. 인지능력이라곤 제게 걸려 넘어진 모든 것을 휘감고선 질척하고 으스스한 타격감으로 포획 대상을 뒤덮고 용솟음치듯 구타하는 것뿐이면서도 사로잡혀 허우적대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면 사리분별이 어렵고 쉽사리 발을 빼지 못하기 때문에 어수선하고 번거롭게 붙잡혀 썩 유쾌하지 않고 질척하게 온몸을 쓰라리게 하는 저것의 애무를 견뎌야 했다. 난 저것으로부터 벗어났지만, “아!” 과녁에 날붙이를 꽂아넣듯 집요하면서 동시에 짙게 농축된 힘이 목표에 도달하자마자 터져 나오듯 우악스럽게 어깻죽지를 낚아챈 표창이 주변을 모르고 달음박질치던 내 중심을 앗아간 것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엉망진창으로 흙바닥을 구르고 한쪽 팔로 엎어진 몸을 겨우 지탱하며 쓸려나간 맨살과 옆얼굴의 쓰라림을 애써 무시했다. 그 순간 나는 이성을 잃고 당연함을 제쳐버렸으며 잔상을 남기지 않는 속도로 날아든 탓에 아직까지도 어깻죽지 근처에서 발작하듯 회전하는 다섯 겹의 표창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공포스러운 진동으로 손을 뻗고 말았다. 나는 알아야만 했고 알고 있었으며 우리 나이트워커들이라면 정녕 몰라선 안 될 가장 중요하고 일상적인 사실을 간과해버리고 만 것이다. 우리가 쓰다듬고 내던지는 모든 날붙이들이 품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치사량의 독성을, 손끝에서부터 퍼져나가며 가슴께를 섬짓 차갑게 굳히는 교활하고 야성적인 힘을. 그러나 어깻죽지를 반쯤 뜯어먹고 지나간 표창이 예사 표창이 아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꺼이 수차례 독이 발린 표창으로 더듬더듬 손을 뻗고 살점 약간과 흙바닥을 함께 꿰뚫어버린 표창을 뽑아 무더기로 내동댕이쳤다. 욱신거리는 어깨를 붙잡고 뜻대로 일으켜지지 않는 상반신을 겨우 꿈틀거리며 가쁜 숨을 헐떡이고 아득한 시야를 굴려 낮이 오지 않는 보랏빛 달의 창공을 쏘아보았다. 이곳 훈련장이 줄곧 이카르트의 영역임을 알려주듯 야살스럽게 억눌린 광기가 넘실거리는 침묵과도 같은 보름, 그러나 나는 저것에 전혀 위축되지도 기세가 사그라지지도 않았다. 그 증거로 숨을 턱끝까지 몰아붙여가며 몸부림치고 주머니를 탈탈 털어 날붙이를 날리고 제 몫의 것 이상의 그림자를 퍼트린데다 마지막 남은 어둠의 날갯짓이 흩뿌리는 깃털마저 그에게 바쳤으며 포기를 모르고 저항하고 안간힘을 쓴 것을 마치 육체의 비명처럼 피력하지 않았던가. 그랬건만 여전히 나는 그의 밤에서 벗어나지도 감히 에레브의 위성과도 같은 도미니언을, 이카르트만의 견고한 암성과 같은 저것을, 그리고 도미니언의 주인인 이카르트를 감히 추락시키지도 혹은 약간의 흠집도 내지 못함에 더없이 한스러웠을 뿐이다. 빠르게 퍼지는 독성 덕분에 불규칙하고 불안스럽게 호흡하는 숨을 삼키다 돌연 조소했다.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말아 올려 비릿하고 능청스러운 헛웃음을 뱉었다. “그렇게 발버둥쳤는데……여전히 당신께 견주기에는 아직도 한참 멀었군요,” “그만하면 기대 이상이다.” 불만스럽게 중얼거린 것을 듣기라도 한 듯 이카르트는 가면마저 벗어버리고선 아마 그의 기준에 대 본다면 넉넉히 자애로울 만큼 옅게 미소지으며 저만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기척도 지나온 흔적도 없이 그러나 원래 제 것이었던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고 스스럼없이 다가와 반쯤 엎어지다시피 나뒹군 날 반듯하게 뉘고 썩 만족스러운 얼굴로 상처를 살폈다. 아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군, “생, 너는 이럴 때마다 꼭 칭찬한 걸 멋쩍게 한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괜히 심술궂은 일을 벌이는 건 아나?” “글쎄요, 모르겠습니다만,” 이카르트의 입가에 묻어있던 엷은 미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애석하고 공교롭게도 오늘의 훈련은 나, 그러니까 사려 깊고 공정하지만, 한편으론 아주 가끔 익살스러운 유희를 즐기는 기사 생셧 경에게만 만족스러운 날일 듯싶은데. 그가 날 그저 자빠트리기 위해 날린 표창은 살점을 뜯어먹었고 민첩하고 유연스럽게 피했을 거라 예상했던 살인기와 같은 비수들은 독성을 품고 팔다리 곳곳에 스며들어버렸으니. “어깨에서 손 떼라, 지저분하면 덧나니까.” 그는 짐짓 윽박지르듯 혀를 차며 상처 부위를 둘러싼 겉옷을 뜯어내다시피 벗겨내고 여상스럽게 품에서 해독제를 꺼내 들이부었다. 온몸으로 퍼져나가던 독성이 차츰 가라앉는 것에 의미모를 해방감과 함께 어깨의 긴장을 풀고 몽롱한 시선으로 이카르트를 올려다보며 이런 순간엔 꼭 답지 않게 착잡해보이는 짙고 선 굵은 미목을 쳐다보았다. “여기도 있습니다.” 표창을 쥐어뜯다 찔린 손끝을 힘없이 흔들어보이자 어깻죽지에 들이붓던 해독제 통을 집어던진 이카르트가 돌연 내 손가락을 물었다. “저어, 단장님, 잠, 잠시만,” 그러나 그가 말을 들을 사람이던가? 축축하고 말캉한 입술에 둥글고 예민한 손끝이 물리고 이를 세우지 않고서 유연스럽고 나긋하게 손끝으로부터 독을 빨아들이는 익숙하고 낯선 혀놀림, 걱정스러운 반면 표독스럽게 내 시선을 놓칠 세야 따라붙는 집요함, 빨아들인 것을 머금고 먼 바닥으로 뱉어내기까지의 찰나는 매 순간순간 새로운 충동과 더불어 아랫배와 사타구니를 가로지르는 환한 울렁거림을 촉발시키기엔 충분하며 차고 넘쳤다. 남의 속이 울렁거리건 메스껍건 상관없이 제 할 일을 마친 이카르트는 손가락에서 맑은 핏방울이 왈칵 물방울을 밀어내고서야 손끝을 놓아주었다. 그러고선 어깻죽지를 잡아 뜯느라 엉망이 된 겉옷을 주워들고 날 둘러업은 뒤, 그 위로 제 망토를 둘러버리곤 여전히 음침하고 스산한 훈련장을 떴다. 그가 오늘의 추적을 마쳤음을 선고하고서야 온몸을 옥죄듯 스며들던 어둠의 장막이 도로 에레브의 향긋한 녹음과 나른한 햇살로 바뀌어갈 때 느낀 아쉬움이야말로 정신을 잃어가던 와중에도 넌더리가 날 만큼 숱하게 겪은 이카르트와 나의 무력의 차이라는 거대한 간극에 대한 시샘과 샐쭉함이라는 기시감이었다.

   언제나처럼 날개뼈를 건드려 본다든가 무릎 안쪽 살갗을 긁어보는 것 따위의 간지럼과 닮은 이 기묘한 느낌은 훈련장을 벗어나고서도 사그라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만 넘겨짚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실은 내게 따라붙는 집착스럽고 기이하고 신비로운 일들을 벌일 사람은 이카르트 단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이카르트 경께선, 날렵한 인상에 얼굴에 뚫린 구멍이며 골짜기의 굴곡마다 그늘이 짙은 음영이 드리운 미인임과 동시에 얼핏 얇아 보이지만 한편으론 굵은 선으로 이루어진 인상과 상냥함보단 엄숙함이 더 잘 어울리는 미목을 가진, 다가가 선뜻 말 걸기 어려운 낯설고 사나운 분위기의 사람이었기에 과연 그에게 장난이라든가 시답잖은 유희가 있을 거란 짐작을 다른 누군가가 자주 할 수 있는 예삿일이 아니긴 했지만. 아마 그로부턴 일반적인 타인과 같은 건조함보단 타이트하고 차가운 무언갈 느끼는 편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이카르트를 둘러싼 모든 경험들이 그는 절대 이런 장난을 펼칠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그저 느낌일 뿐이었던 짧은 감상이 실제로 온몸을 간지럽히듯 옥죄고 있는 것 같은 이 막연한 기묘함의 기원은 어디일까? 정말 그로부터 왔을까? 곁을 맴도는 익숙하고 집요한 이물감, 그러나 쫓기고 있을 때의 급박함도 날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어쩔 수 없이 붙잡혀버릴 언젠가를 앞서 인정하는 비굴함도 없이 깔끔했고 날 구속하지도 않았다. 살생이며 추적과는 전혀 다른 목적의 요 이물감으로부터 어쩌면 난 이미 붙잡힌 걸지도 모른다. 이미 끈질기게 붙잡혀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저들 그림자의 품 안에 가두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전해지는 움직임과 진동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카르트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가장 믿음직한 품을 내어주는 사람이었다. 그의 권능, 손놀림, 힐난이며 위압감은 당연스럽게도 가슴 한편에 섬뜩한 두려움과 무섬증을 남겨두도록 종용했지만 그로인해 위축된 나를 일으켜 세우는 단단한 손과 퍽 애교스럽게 곰살가운 툴툴거림 역시 이카르트의 것이었다. ‘다만 나와 마주하고 결부시키는 나만의 이카르트, 그는 나에게 아주 단순한 유의 스승이며 상관은 아니란 점이다. 그로부터 두려움과 애틋함을 뒤섞어 느끼는 기사단원이 또 누가 있겠는가.’ 머릿속을 부산스럽게 어지르던 온갖 미련과 애정과 육욕과 같은 기대감들이 모두 막연하고 추상적인 허위로 뒤덮이는 순간이었다. 어디까지 넘어올 수 있음을, 얼마나 매달릴 수 있음을 단언하지 않은 위태롭고 오묘한 관계가 그들의 지난 일을 흐릿하게 뭉뚱그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단순한 표현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명확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은 것들뿐이었으나 이 사실은 되려 생의 기분을 잔잔한 흥분감으로 독촉하고 있었다. 병동의 둥글고 높은 천장과 적막한 밤의 품으로 느리고 일정하게 떨어지는 수액의 옅은 똑똑거림만이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자잘하고 깊은 상처들과 흙바닥을 구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몽롱한 수마의 저편으로 밀어버리고 있을 뿐이다.

   저편 그곳의 나는 현실에서보다도 무력했으며 흔히 하는 공상처럼 꿈속에선 누구보다 강인하고 비현실적인 육체를 가질 수 있다는 법칙을, 생각만으로도 모든 걸 이루어내는 꿈만의 법칙을 망각한 듯 여전히 상처조차 아물지 않은 피로한 육신을 이끌고 이카르트에게 업혀 빠져나왔던 훈련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막 훈련을 마쳤던 초저녁처럼 군데군데 찢기고 긁힌 전투복 차림에 목이 긴 구두와 웃옷으로도 채 가리지 못한 허벅다리와 양 볼 따위의 맨살을 드러내고선 가엽게 떨고 있었다. 주변을 에워싼 스산하고 날카로운 공기는 피부 속으로 스며들어 혈관 사이사이를 불친절하게 훑고 지나가듯 온몸을 예측할 수 없는 긴장과 격앙으로 채우고 있었다. 피로하고 건조한 눈을 들어 처음 마주한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빼곡한 숲의 초입이었다. 어두운 녹색의 잎들이 한데 모여 더 짙고 우아한 색을 뿜어내며 자신들을 바라보는 누구든간에 형용할 수 없는 현혹으로 끌어당기는 가장 흔한 자연경관, 그것에 나는 시선을 내주었고 오감각을 팔았으며 홀린 듯이 목이 긴 신발 속에서 반들반들하고 푸른 핏줄이 드문드문 엿보이는 발등을 빼냈다. 은신과 회피 훈련을 위한 가장 어둡고 고요한 숲의 입구는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어서 이곳의 품으로 들어오라. 저것은 공포이며 안락함이었고 경건하며 매혹적이었다. 맨발에 밟히는 까슬한 흙바닥과 훈련장을 이루는 울창한 수목은 견고한 줄기 사이로 빛이 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빽빽하게 우거져 일대를 뿌리칠 수 없는 고압적인 위압감으로 채우고 있었다. 난 저것에 위축되거나 혹은 저것으로부터 내 기척을 위탁하기도 했던 숱하고 고된 훈련을 기억한다. 가슴 안쪽과 주머니를 두툼하게 채우던 그 많던 날붙이도 어둠 속을 파헤치고 걷기 위한 가장 견고한 신발도 없이 예측할 수 없는 위험으로 걸어 들어가는 짓은 분명 옳지도 앞뒤가 들어맞지도 않는 일이었으나 꿈의 법칙은 날 저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무의식의 누군가는 반드시 숲 안쪽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꿈만의 억지스럽고 그럴듯한 모호함을 앞세워 설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멈춰 섰다. 아니, 강제로 멈춰 세워졌다. 턱끝을 아슬아슬하게 베고 지나가는 어둠의 날갯짓과 날카로운 힘이 주변을 이전과 다른 공간으로 인도하듯 창공을 가르고 초저녁의 누르스름하고 붉게 지는 해를 저물어버린 한밤의 을씨년스러운 보름달로 바꾸어놓았다. 딛고 선 흙바닥과 들이마시고 내쉬는 공기조차 압도당하고 지배당한 것처럼 주변이 이카르트만의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를 위하던 이카르트가 아닌 내가 모르는 이카르트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나에게 경고하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네가 들어오려는 곳은 무던히 상처입어야 하고 전혀 발랄하지도 따스하지도 않은, 그 누구보다도 위험하고 차가운 품이라고.

   “헉!” 마침내 나는 호흡한다.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듯 바깥은 여전히 한밤이었고 협탁에 벗어 개켜둔 겉옷을 겨우 주워입고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목덜미에 송골송골한 땀이 빠르게 식으며 잔뜩 위축된 육체와 체온을 식혀주었다.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후련함이 아직 꿈의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머릿속을 깨끗이 환기하고 있었다. 막 깨어난 탓에 신발 없이 맨발인 것은 어쩌면 꿈과 현실을 이어주는 의미모를 창구 같았다. 약품 냄새와 빳빳하게 세탁된 침대보가 풍기는 말끔한 병동 냄새를 맨발로 휘젓고 나가고픈 충동은 그저 아직까지도 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뿐이라고 되뇌며 옷매무새를 꼼꼼히 정돈하지 않은 흐트러진 차림새로 침대에서 내려와 병동 바닥을 밟았다. 고르지 못한 호흡과 몽롱한 울렁거림을 부추기는 악몽 아닌 악몽의 여파가 정신과 육체를 뒤흔들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바깥으로 나가기를 원하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문 근처에서 꾸벅꾸벅 조는 군의관에게 들키지 않도록 몸을 잔뜩 웅크리고 엉금엉금 기어 좁게 열린 문틈으로 겨우겨우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마치 그 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서 있던 이카르트의 어깻죽지가 미약한 놀라움으로 발작하듯 움찔거렸다. 제 옆에 겨우 실낱같은 두께로 열린 병동 문 안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밤의 침묵을 비집고 흘러나왔던 것이다. 심장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온몸이 차게 식는 기분이 이카르트의 정수리부터 발톱 끄트머리까지를 무시무시하게 훑고 지나갔다. 지난밤부터 생을 향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려 그의 온몸을 휘감고 무얼 하고 있는지 움직임을 느끼고 몸 구석구석을 괜스레 찔러보던 것을 들킨 것만 같은 두려움. 정말 들켰나? 물론 물리적인 위치를 알아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에겐―기민하고 본능적으로 감각을 곤두세울 줄 아는 우리 나이트워커들에겐 확실한 목격과 증거만으로 확정지을 수 없는 일을 겪었을 때 어딘가에 숨어있는 심증을 알아채고 파헤치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런 직관을 가진 기사를 길러내는 것은 이카르트 그만의 또 다른 직관이기도 했던 것이다. 역시 몰래 훔쳐보다 걸릴 것은 당연하고 뻔했다고 양심 한켠에서 홀로 끊임없이 속삭이던 섬뜩한 직관이 만일의 상황을 예감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먹고 불어나 이카르트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굳은 듯 서 있던 시간은 고작해야 수 초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짧았지만 돌아보는 것을 수십 번 망설인 탓에 아득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두려움과 면구스러움을 겨우 삼키며 병동의 열린 문틈으로 몸을 홱 돌렸을 때, 정교한 세공의 문고리를 붙잡고 제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을 때, 옅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엉금엉금 기어 온 행색으로 제게 문과 함께 끌어당겨 엎어진 그 아이를 보았을 때, 이제껏 숨어있던 것을 들킬까 봐 남몰래 속앓이했던 무섬증과는 다르고 생경한 우울이 한꺼번에 덮쳐왔다. 왜, 왜 그러고 있어?

   “왜 안 자고 나왔지?” 그러나 내 목소리는 평소와 너무나도 똑같다. 낮고 억눌렸으며 능숙하게 감정이 배제된 차분하고 고압적인 음성. “어디 아프기라도 한거야?” 감히 네가 그 아이에게 어디가 아픈지 물을 자격이라도 있다고 생각해? 방금까지 네 손에서 느껴지던 생의 뒤척임과 악몽을 꾸듯 안쓰럽게 일그러진 눈가 따위의 감촉을, 그 아이의 온몸을 감아쥐고 있던 나의 그림자들 덕분에 마치 손안에 가두고 움직일 수 없도록 어느 순간을 붙잡아 둔 것과 같던 잠깐의 만족감을 벌써 잊었어? 가증스럽고 탐욕스러운 새끼. 이카르트의 속에서 자조와 비난이 부풀어 올랐다. “아뇨, 아니에요.” 생이 다급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픈 건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걱정하실 것도 아닙니다. 전, 전 괜찮아요.”

   생의 태생적으로 흰 얼굴이 평소보다 더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으로부터 생기를 빼앗은 건 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생을 곁에 두려면 그는 나로부터 온갖 사람다운 것을 빼앗겨야 할 것이다. 가령, 방금처럼, 난 그의 밤마저도 포기할 수 없다. 생의 얼굴은 말과 달리 여전히 창백하다 못해 하얬고 밤의 어두움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색으로 파랗게 질려 있었으나 그저 내게로 엎어진 것 외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아챈 듯 빠른 속도로 안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난 다행스럽지만 못마땅했고 순수한 흐뭇함을 느꼈으면서도 문란한 욕정으로 가득했다. 생은 나로부터 아무리 착취당하고 생기를 잃어도 여전히 생일 거라는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그러나 아무리 쥐고 흔들어도 곧은 중심을 잡는 너를 몇 번이고 망가뜨리고 싶은 비도덕적인 소유욕을 느낀다는 사실에 비참해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꿈꾸고 자위하는 어떤 짓이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임을 암시하는듯한 생의 굳건함 역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가장 두려운 것은 너를 내 뜻대로 휘둘렀을 때 네가 보일 경멸과 내가 느낄 참담함을 철저하게 무시하고서, 어떤 짓이든 해낼 것만 같은 나의 제동 없는 집요함이었다.

   “제가 또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실 건가요.”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 아닌 확실하고 단조로운 말씨, 말끝에 물음표를 붙이지 않아도 될 만큼의 일정한 높낮이, 옅은 숨소리가 섞인 높지도 낮지도 않은 울림 있는 음성, 그토록 갈구하던 생의 목소리였다. ‘잘 아는군, 넌 가끔 스승이든 상관이든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이 과감하고 격 없이 굴잖아. 다 알고 있으면서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거라든가,’ 너의 물음 아닌 물음에 평소처럼의 나라면 이렇게 대답했을까? 방금까지 문틈으로 그림자를 밀어 넣고 간접적으로 전해지는 네 몸의 굴곡을, 결을, 옴폭 들어간 곳곳을 탐험하듯 건드리고 지나쳐온 내가 아니었다면 망설임도 자책도 없이 낮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정말 괜찮은 것처럼 행동할 힘도 없으면서 건강하고 자신만만하게 굴지 말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걱정과 염려가 까칠하고 못마땅한 태도로 내뱉어지는 것이 싫어서 대신 여전히 제 곁에 있어 줄 것임을 피력하기 위해 군의관이 깨지 않도록 문을 살그머니 닫았다. 팔을 조금 뻗었다 그뿐 내게 기대있는 생을 밀어내거나 뿌리쳐야만 하는 큰 움직임은 아니었다. 생은 마치 이 손짓이 내게 더 기대있어도 된다고 허락받은 신호탄임을 알아챈 것처럼 가슴과 겨드랑이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두운 밤에 잠겨 얇고 반투명하게 반짝이는 백은발이 결 좋게 흔들리며 턱밑에서 가만가만 이마를 비비는 몸짓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단장님, 실은, 사실은요. 당신께서 제게 당신의 곁으로 걸어오라 유혹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전 두려움에 떨면서도 입고 있던 옷가지며 신발마저 벗어 던지고 다가가고픈 욕심이 들었어요. 온 힘을 다해 참아냈지만, 다가가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꿈속의 단장님께선 나는 위험하고 음험하고 옳지 못한 존재라고 했는데도요. 상관없었어요. 단장님께서 제게 단장님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당연히 다가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어요.” 난 너의 젊고 용감하고 보통의 것과 동떨어진 취향에 기함하면서도 그것을 사랑스러워했다. “난 그렇게 무모하고 조심성 없는 일을 벌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어. 네게 보이는 내가 좋은 스승이라든가 상관일지는 모르지만, 사람으로선 확신할 수 없군. 물론 애초에 모두에게 선인일 순 없지. 그렇다 한들 내가 너에게 선인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데. 난 네 생각보다 더 악인에 가까워,”

   “아뇨. 당신께선 충분히 선인이에요. 선인이고말고요. 부끄럼 많고 숨어서 엿보기 좋아하는 되바라진 선인이고말고요. 분명 그럴걸요. 그럴 수밖에 없을걸요. 절 놓아버릴 생각이 아니시라면요, 제가 당신의 품에 있는 걸 못 견디지 않으신다면요. 감히 당신께선 제게 완벽한 선인이라고 하겠습니다. 당신은 위험하고 두렵고 아름다워요.”

   나는 고아하고 탐스럽고 내게 쉽게 끌어당겨지는 기사 생을, 정확히는 생셧을 곁에 둘 수 있었음에도 괜히 대단하고 아량 넓은 신사인 체하다 머뭇거리고 가만 놔뒀던 것에 지금 매 순간 나의 품과 턱밑에서 엷게 떨며 거듭거듭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사랑스러움을 보고서야 한없이 후회하고 말았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