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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달

by 김은달@xxndxl

   어느 날은 자고 일어났더니 발가락 끝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물이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의 적은 양이었다. 발톱 근처에만 맺혀있던 물방울은 하루가 지날수록 그 면적을 넓혀 한 주 뒤에는 발목의 경계선 근처를 적셔 두었다. 혼자 사는 집에 누군가 몰래 들어와 발을 씻겨준 것도 아닐 테고 요정이 장난을 치고 간 것도 아닐 것이다. 그 한 주 동안 나는 신고 자던 양말을 벗어 두었고 침대 밖으로 발을 내밀었고 비닐 같은 것으로 발을 감싸보기도 했지만, 썩 도움이 되었던 방법은 없었다. 특히 입구를 묶어둔 비닐 안쪽으로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을 땐 차라리 이불이나 침대가 젖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건조한 바닥을 밟는 감각이 아주 잠깐 그리웠다.

 

   사실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물이었다. 매일 아침 축축하게 젖어 있는 발과 그 주름 사이를 얽고 들어간 습기가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뜨고 사물을 인지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물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작은 컵 안에 담긴 투명한 물도 어항 속 조명이 비쳐 수십 개의 빛을 반사하는 물도 뜨거운 태양 빛을 머금어 그 열을 온전히 받는 바닷물도 좋았다. 그중에서 특별히 더 좋아하는 것은 강이나 호수처럼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물이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그 물에 빠지는 것을 좋아했다. 온몸을 차가운 물로 뒤덮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 지 꽤 되었다. 얼마 전까지는 비가 지독하게 내렸다. 마감 직전에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 어느 때의 기사단처럼 한동안 내리지 않은 업무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비는 이틀간 내렸다가 잠시 그쳤다 다시 내리기를 두 달간 매일 반복했다. 그 이후에는 한 달간 습하지 않은 공기 속에 머물렀다. 가습기를 틀거나 새 식물을 들이기에는 공기의 습도가 점점 내려가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무난하게 지나간 날들이었다. 갈라진 발뒤꿈치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겨울이 턱 끝까지 와 있었다. 도움이 된다는 몬스터의 점성이 있는 액체 몇 가지를 발라 보기도 하고 꽤 괜찮은 피부 관리사도 찾아가 보고 마법을 부리는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기도 했지만, 피부는 점점 더 갈라지기만 했다. 이 정도라면 갈라진 틈 사이로 바람이 불고 있을 법도 한데 그런 냄새는 아쉽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상태대로라면 발에서 시작된 균열이 온몸을 뒤덮어 피부 전체가 갈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다. 다만 차갑게 젖어 있는 발을 만지며 깨어난 이후로부턴 갈라진 틈은 자라기를 그만두더니 이내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발을 감싸 안은 물이 사막의 땅처럼 갈라질 뻔한 나를 구해주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

   어느 날부터는 세수라도 하고 나온 것처럼 얼굴이 젖기 시작했다.

   눈물도 땀도 아닌 흔한 물이었다. 점성도 짠맛도 색도 향기도 없었다.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그런 물, 차갑고 맑은 물. 차라리 울었다면 온 얼굴 근처로 번진 물기를 납득이라도 했을까 싶었지만 곧 그런 방식의 합리화를 그만뒀다. 이마 쪽 머리카락은 막 감고 나온 것처럼 물방울이 남아 있었고 얼굴을 중심으로 베개의 양쪽도 젖은 것이 확실히 보일 만큼 색이 달라져 있었다. 눈물이나 땀으로 이만큼을 적시려면 온 밤을 내내 울었을 것이다. 며칠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렇게 많은 양을 울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비가 내리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얼마 전까진 장맛비가 지독하게 내렸다. 비가 내리지 않게 된 이후에야 비가 멈추지 않던 마을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모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 마을을 떠올릴 때마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양립 불가능한 두 사건이 서로를 짓누르는 동안 머릿속이 과부하 된 것처럼 달아올랐다. 한계까지 과열된 전원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을 감싸는 공기가 건조했기 때문에 열기는 뇌 가장 안 쪽까지 빠르게 번져 나갔다.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머리를 자극하는 통증이 심해지면 찬물이 가득 차 있는 욕조에 머리를 집어넣고 더는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까지 버텼다. 쉴 수 없는 숨을 억지로 참는 것이 타오르는 온도를 견디는 것보다 나았다.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가열될 힘을 잃은 뇌가 잠시 생각하기를 멈추면 욕실 벽에 앉아 겨우 숨을 골랐다. 젖은 머리카락으로부터 피부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을 세고 있으면 다시 비가 내리던 마을을 생각하게 되었다. 극도로 자연스러운 회귀였다.

   안부를 물을 수 없는 그리움은 강 하류에 쌓이는 모래알처럼 가장 낮은 곳부터 천천히 차오른다. 발목을 채우던 침전은 어느새 목 근처를 간지럽혔다. 마른기침을 하는 날이 늘었다. 왜 세계는 나를 잊었으나 나는 이 세계의 어떤 것도 잊을 수가 없는지 불공평을 불평해봐도 대답은 없었다. 사실은 잊어서는 안 되지, 추억 속에서 내가 사라지더라도 나는 그 추억을 놓아서는 안 되지. 가슴 근처를 괴롭히는 통증으로 손을 가져다 대면 동그란 구슬이 잡힌다. 그 부근을 시작으로 다시 통증이 번진다. 자갈이 든 채로 흔들려 안쪽으로 스크래치가 가득 찬 유리병처럼 온몸이 피부 안쪽부터 긁히고 있었다. 겨울과 맞닿은 피부가 더욱더 뜨겁게 느껴진다. 더 참을 수가 없어 마침내 나는 온몸을 차가운 물로 뒤덮고 싶었다. 머리가 감당할 수 없는 열기가 아래와 바깥을 방향으로 하여 퍼져나가고 있었다. 선호와 의무와 당위와 같은 개념어는 내가 판단할 필요가 있을 때만 범주의 경계가 모호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나의 존재가 소멸한 세상에서는 이룰 수 없었다. 나는 숨을 쉬지만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당장 눈을 깜빡이는 동안 이 세계에서 지워지더라도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속눈썹 끝부터 볼의 바깥을 타고 새벽보다 차가운 물방울이 흐른다. 내려다본 무릎의 색이 점점 짙어졌다.

 

 

 

*

   어느 날부터는 온몸이 젖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악몽을 떨치고 눈을 뜰 때마다 사라지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몸을 일으켰다. 크고 작은 물방울이 뒤덮고 있는 피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아직 어스름한 새벽빛이 굴절되어 피부 아래가 투명하게 보일 때가 있었다. 그 반짝거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딱 그만큼 내가 차지하는 공간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당장 오늘 이만큼의 내가 사라지고 내일 또 이만큼의 내가 사라지기를 며칠만 반복하면 이 우주에서 나는 완전히 지워지고야 말 텐데, 팔을 털어버리기에는 그 위를 성기게 메운 물방울의 무게가 과했다. 눈을 뜨고 그 무게를 온몸으로 온전히 받아내는 시간을 견디면 물방울은 중력의 방향으로 천천히 한 방울씩 떨어졌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몸이 가벼워졌다. 고개를 들어 창밖의 풍경을 응시한다. 해가 그림자를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을 망가트릴 정도로 높아졌던 체온이 급격히 정상의 수준을 되찾았다. 머리를 괴롭히던 생각들은 온도에 맞는 상태로 응고된 채로 생각이 흐르는 곳 구석마다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들은 증명되지 않은 존재의 무력감과 오래된 친구들에 대한 애틋함과 같은 것들이었다. 형태가 명확한 감정이 정리된 상태에서 나는 겨우 내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온몸이 차가운 물로 뒤덮인 이후에야 그리움의 방향이 명확해진다.

   오늘은 오랜만에 비가 내린다. 먼 길이를 달려 온 물방울이 머리, 어깨, 발등을 차례로 적시면 비가 그치지 않던 그곳의 너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비가 내리지 않는 날에는 이제는 울지 않고 있는 네가 생각나서 사실 나는 숨을 쉬는 모든 순간마다 너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워하는 것은 너였다. 나의 안녕을 위해 너의 안녕을 포기한 너를 잊을 수는 없었다. 세계가 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 것이 나의 이타심 덕분이라면 그런 이기심은 나를 다시 소멸하게 만들 것이다. 내가, 그리고 네가 사라지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아직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지켜야 할 세계가, 만나야 할 네가, 네게 돌려줄 증표가 남아 있다.

   언젠가는 이 그리움의 통로가 양쪽으로 개방되어 내가 너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네가 나를 그리워하기를,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그리워하기를. 그런 날이 올 때까지 나는 나를 두렵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물러서지 않기로 했다. 너의 이름을 낮게 불러본다. 나의 목소리가 흐르는 빗물을 타고 네가 있는 곳까지 닿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 그곳에 닿아 너의 머리, 어깨, 발등을 차례로 적시는 비로 내리면 내가 가진 그리움의 냄새를 네가 기억해주기를.

 

   발 끝이 천천히 물에 잠긴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이 나를 지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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